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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일상(구)/매기의 추억

나꼼수...진화를 기대한다.(조한혜정 칼럼을 엉뚱하게 보며)














 

'나는 꼼수다'가 요즘 약간의 분란이 있는 듯하다.
'가카를 위한 헌정'이라는 모토로 골방에서 쏟아내는 정권 비판속에 수 많은 시민들은
대리 배설을 하며 호응했고,현 정권의 굵직한 비리를 공론화하여 서울 시장선거에서
쓰거운 패배를 여당에게 안겨주는 공도 세웠다. 
정치적 담론을 담아내기 시작하며 여권과의 최전선에 섰고,그 열풍은 가히 대단했다.
그러나 그 열풍 값을 엉뚱하게 치루고 있다.
다름 아닌 '가슴으로 펼친 퍼포먼스'에 대한 반응이 성희롱으로 비화 되면서 시시비비가
남녀의 대결구도로 가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한혜정' 교수님의 한겨레  칼럼(1212.02.08)을 읽어 보면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잘 말씀하셨다.
여성 운동을 줄 곧 해 오신  노 교수의 혜안과  깊은 관조에서 나오는 조언은 '나 꼼수'팀이
새겨야 할 대목이 아니가 싶다.






'나꼼수'의 사안은 여기까지.

나는 정치적 표현에 있어,그 표현의 인식이나 담론을 말하려는게 아니다.
그런 이야기와 향후 돌아가는 여론은 트윗이나 페이스 북을 몇 분만 들여다 봐도 자세하게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꼼수'팀의 대응 또한 '나는 꼼수다 봉주 5회'를 통해 언급하리라 믿는다.

(...나꼼수 봉주 5회 나왔네요.참고하세요.
2월9일 추가) 


                      사진출처 

                   Daum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조한혜정'교수님의 칼럼중 다음 대목에서 방점이 가기때문이다.
 

                                                                       

                            조한혜정(연세대 문화인류학 교수)

경쟁과 적대의 원리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남자들에게 여자와 함께하는 섹스의 순간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섹스에 대한 집착은 사회생물학적인 것이고 실은 남성세계에 편재한 폭력과 암투, 외로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자들이 사는 인류 사회에서 환갑이 지난 남자들은 존경받는 존재였다. 아랫도리가 아니라 가슴과 영혼이 충만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섹스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지면서 손주와 노는 즐거움에 취하고 더 나이가 들면 적절한 때에 곡기를 줄이면서 세상을 하직할 준비를 했다. 이런 이상적 모습에서 멀어졌다고 해도, 나이 들어서도 포르노를 보거나 비아그라를 복용하면서 그 ‘노동’을 힘겹게 해야 하는 것은 안쓰러운 일이다. 그간 성적 농담이 남성 간 연대를 드높이는 언어문화로 자리잡아버린 것이 안타깝고, 남성 간 연대를 한다면서 실상은 대표조차 뽑지 못해 여성들에게 기대게 되는 상황도 안쓰럽다. 그러나 그것이 워낙 오랜 세월 남성세계에 자리잡은 관성이자 문화여서 쉽게 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생물학적 특별한 의미'로 들어서는 시기와 집중하는 시기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집중이 풀리고
전이( 轉移) 혹은 변화하는 리비도를 살펴보고 싶은거다.
한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고 왕성한후  쇠퇴(衰退)하는 과정에서 리비도의 흐름 또한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칼럼 대목은 '리비도'의 변화를 풀어낸 이야기로 나는 이해했다.
이야기가 아름답다.(내가 이해하는 방식대로라면)
 
'리비도'가 사회생물학적으로 흐르게하고 변화하는 힘은 무엇인가?
인간만이 동물들과 다른 '충만한 존재'로 변화 될 수 있는 동인(動因)은?

'리비도'에 관한 심리학적 어쩌구,저쩌구하는게 아니다.나도 모른다.
다만 '사랑'이란 의미를 조심스레 꺼내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개개인이 본능과 혼재되어 단순한 '끌림'으로써가
아니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혹은 예수님이나 붓처님이 아니더라도 
'보편적'으로 좀 객관화 된 '사랑'이거나,변화된 에네르기.

'생물학적 특별한 의미'로 들어서는 시기는 유소년,집중하는 시기는 청장년,쇠락하는 시기를
노년기로 크게 나눠 본다면 시기,시기마다 지향하는 사랑의 에네르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칼럼에서 그것의 일부를 이렇게 말한게 아닐까 싶다.

 " 현자들이 사는 인류 사회에서 환갑이 지난 남자들은 존경받는 존재였다. 아랫도리가 아니라 가슴과 영혼이 충만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섹스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지면서 손주와 노는 즐거움에 취하고 더 나이가 들면 적절한 때에 곡기를 줄이면서 세상을 하직할 준비를 했다."
존재 자체를 존재로만 사랑 할 수 있는 자유로움. 
  
어쩌면 인간만이 고유하게 발달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시기 시기마다 깊고도 아름다운 변화와
질적 변화 통해 인류를 지속 가능하게 했고, 지속되는 한 아름다움이라는. 


               나는 그런 '사랑'을 이렇게 노래 해 본다.


몸통이 끊어지고 창자를 늘어뜨린 애벌래를 보았나.
조용한 휴식이 찾아온다. 고통의 끝.
더 이상 아코디언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숨쉬듯 미세하게 들먹일뿐.
혹은 슬퍼하고 있을지도
잠시후 그는 머리 부분을 가만히 움직여 본다.
무엇을 찾을 수도.

                  --- 사랑하는 친구들
                        햇살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고
                        손가락 마디마디 사랑을 그릴때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이 답답한 횡설수설을 참아다오
                        이 속도감에,안타까움에 시달리는가?
                 --- 사랑을 부탁한다. 
                             
                                                                   글/임승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