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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일상(구)/인생노트

자유로부터의 도피

<갇힌 나무, 2013 헤이리>




 

성신여대역에서 범계역까지 지하철을 이용하여 출퇴근한다. 순전히 지하철 타는 시간만 1시간 10이나 걸린다. 하루에 2시간 20분, 오로지 내가 내 맘대로 생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다. 생각의 자양분 보충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출근길 집에서 나올 때 언제나 한 손에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나온다. 다른 한 손에는 갤노2가 쥐어져 있다. 일단 지하철에서 자리를 잡으면 책을 펴들고 진득하게 읽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의 손가락은 사랑스런 갤노2를 먼저 더듬는다. 그리곤 출퇴근 시간 내내 그녀석이 나와 동행한다. 스마트폰은 나의 눈이며, 귀이고, 나의 친구이면서  나의 확장된 몸(☜클릭)이다.

 

오늘도 퇴근길 빈손으로 퇴근하다 다시 사무실로 되돌아가 책을 한권 꺼내들고 나왔다. 그러나 자리를 잡는 순간 여지없이 페북질이 먼저다. 페친들의 알림 메세지들이 달리는 말위에서 산을 바라보듯 스쳐 지나간다. 그 중 유독 한 페친이 책의 일부분을 복사해서 올린   진정한 자유(☜클릭)에 관한 글이 나를 멈추게 한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의 자유가 아닌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라는 요지의 글이다. 일전에 대화를 나누면서 추천한적이 있는 책의 한 부분이였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이론 물리학도였다가 승려가된 아진 브라흐만(법명)이 쓴 "술취한 꼬끼리 길들이기"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구속, 2012년 12월 문래동>



 

자유[ freedom , 自由 ]라는 단어가 나를 생각의 깊은 터널 속에 가둔다. 무엇이 자유일까? 자유롭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정말 자유로울 수 있을까?  머리를  흔들고 페북을 아무리 들여다 봐도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단어가 나의 생각을 구속한다. 

 

나도 그렇지만 스스로 자유롭다거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내 주변 누구에게도 찾아본적이 없다. 사전적으로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를 자유라고 한다. 따라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그 무엇엔가 얽혀있고 매여 있다는 뜻이 될 것인다. 

 

집에 오는 동안 그 얽혀 있는 매듭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모두 사람, 물질, 그리고 시간과  관계된 것들이다. 작게는 어린 자식들과 아내, 그리고 노모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회사에서는, 사회에서는 낡고 오래된 규칙과 통념들이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는 시줄과 날줄처럼 시간 그리고 돈으로 서로 얽혀있다.  

 

집에 오는 내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내 스스로 자유를 찾을 방법이 없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인간의 속성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자유가 정말 인간의 속성일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는 것 같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이 자유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헤이리의 어느 카페의 나무처럼 나를 올가매고 있는 관계에 의해 팔다리 묶인채로 자유를 동경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내가 편해지려면 결국 나를 옭아매고 있는 존재와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가 현실과 타협하고 범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물론 자유를 찾을 방법이 전혀 없은 것은 아니다. 나를 속박하고 구속하는 모든 사슬을 끊어 버리면 된다. 그 질기고 강한 쇠사슬로 묶인 연줄을 끊기 위해서는 둘 줄 하나를 선택 해야 할 것이다. 연 줄을 끝어 자유롭게 하늘 나는 상태가 되고 싶지만 이는 곧 갈기갈기 찢기어 땅에 떨어질 죽음을 의미한다. 샤르트르의 말처럼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자유로부터 완전히 탈출하지 못한다.  또 다른 방법은 종교에 귀의하여 수도자가 되는 길이다. 나는 이 둘 줄 하나를 선택할 용기를 눈꼽 만큼이라도 가지고 있질 못하다. 따라서 나는 평생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사진찍기, 2013년 2월, 묵호>



 

남은 생을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로서, 나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나 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존관계를 최소화하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몰입할 대상이 필요하다. 혹자는 천사가 흘린 악마의 눈물, 술로서 돌파구를 찾을 지도 모른다. 혹은 여행으로, 운동으로 위안을 삼을수도 있을 것이다. 글을 쓰며, 시를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는 것이 그 돌파구 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현재로선 사진함이 그것이다. 사진함 자체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에서부터, 작고 하찮은 것 까지 존재의 가치(☜클릭)  를 찾아내는 기쁨이 크다. 얼마전에 페친 한분께서 이런 질문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나는 무엇을 말하기 위하여 사진을 찍는가? 그때 "나는 작은 존재의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사진한다"라고 대충 얼버무린 적이 있다. 오늘 퇴근길 자유라는 명제에 대한 생각때문에 사진함의 더 큰 이유를 발견한 것 같아 기쁘다. "자유로부터 도피"를 위해 사진하는 못습을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