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는 나
덕수궁 석어당 뒤 편에는 아파트의 베란다 처럼 방을 넓게 쓰기 위해서 별도로 기둥을 만들어 칸을 만든 가퇴가 있다. 가퇴가 덧대어 지지 않은 벽면 창살을 통해 석어당 끝 방 내부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창문 아래쪽 1/3정도는 창호지가 발라져 있지 않았다. 침 바른 손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람객이 많아 아래 1/3정도의 창호지를 떼어 내었다는 설명을 잘 알고 있는 궁궐 해설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창호지가 발라지지 않은 그 정방형 문살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문 살 안은 어둠만 보인다. 어둠 속 짧은 시간의 흐름 따라 11살 나이 많은 아들 광해를 둔 인복대비의 가시밭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과 세상이 그들의 것 이었을 텐데... 어둠이 가득한 텅 빈 방이 나에게 주어졌다. 짧은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긴 시간도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순간정적 속에서 셔터에 손을 대고 숨을 멈추며 들여다 보고 있는 온몸에 전율이 전해진다.
잠시 내게 주어진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래쪽 창호지 없는 문살 사이로 낮게 드리워진 가을 빛이 강하게 들어온다. 위쪽 창호지가 발라진 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은은하게 방 내부를 밝힌다. 이때 반대편 창문 앞으로 검은 선그라스를 낀 노신사가 힐끔 처다 본다. 갑작스레 주어진 주체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으로 어찌할 바 모르고 멍하게 안을 들여다 보고만 있던 나는 다시 한번 숨이 멈추어 버렸다. 무의식적으로 연거푸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1/200초로 분절된 시간을 담아냈다. 노 신사가 건너편 창문을 통해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채 2초도 되지 않은 것 같다. 그 짧은 순간 처음으로 내가 나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때 느낌 때문에 지금도 오싹함을 느낀다.
이 세상과 나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중심에 있었다. 나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필연적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자기중심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기라는 이유 때문에 ,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사실 때문에 난 가족의 중심에 있었다. 커가면서 학교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잠시 벗어난 듯 해 보였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일했으며, 인정도 받았다. 자신감도 강해고 그리 해낸 적이 많다. 내 스스로 사랑 받을만한 소중한 존재이며,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 강했다. 자존감(self-esteem) 이 상당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 순간 내게 주어진 좁은 공간 짧은 시간, 잠시 지나는 노신사의 눈을 통해 내가 본 나는 이미 작아져 있었다. 마치 대기권을 막 벋어난 시간의 우주선 속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것처럼 작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하찮은 존재임을 알아가는 것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 같다. 진아(眞我)을 발견하고나니 떨림도, 오싹함도 사라져버렸다. 성숙함을 투시 해주는 것은 결국 시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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