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익은 부채
전날 엄마랑 화폐 박물관과 우표 박물관을 다녀온 둘째 녀석이 다 둘러 보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일요일은 날 아침 10시부터 연다고 아빠랑 꼭 다시 가겠다고 성화다. 그 녀석에게는 작은 디카 손에 쥐어주고, DSLR카메라를 챙겨 길을 나섰다. 박물관이라는 것이 특정 주제나 사물 혹은 문화에 대하여 변천과정을 시대 순으로, 관련 주제별로 한눈에 보고 느끼게 할 수 있어 교육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옛날 한국은행 빌딩을 개조하여 만든 화폐박물관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동안 구석구석 다니며 사진을 찍던 녀석이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 내게로 달려왔다. "아빠 !, 근처에 다른 박물관 없어요?, 중앙박물관 가고 싶어~, 가자~ 빨리 가자~" 이제는 어지간히 실증 났나 보다. 중앙박물관 대신 경복궁에 있는 민속박물관을 가기로 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맘 먹고 장만한 카메라 한대가 집안의 재산목록 상위에 들 던 시대가 있었다. 디지털화 되면서 이제는 개인별로 다 하나쯤 가지고 있는 필수품이 되어 버렸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준 변화이면서 충격이기도 하다.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정신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녀석 뒤쫓아 다니는 것만도 벅차다.
앉은뱅이 의자와 책가방
3관 유리 벽 넘어 낮 익은 소품이 시선을 끈다. 오래된 앉은뱅이 나무책상과 책가방이다. 고등하교 때 까지 가지고 다니던 책가방이다. 저 책가방에는 책도 책이지만 큼직한 도시락 두 개 항상 들어 있었다. 하나는 일반 크기 하나, 밥 양이 2배나 들어가는 도시락 하나에 반찬 통하나에, 김치 병을 넣어 싸 들고 다니던 가방이다. 7시까지 등교하던 시절이라 조조학습 끝나고 나면 하나 까먹고, 나머지는 점심시간이 채 되기도 전 3교시가 끝나면 까먹었다. 가끔 어머니께서 도시락 밑바닥에 깔아 주 계란 프라이는 최고의 찬이었던 기억이다. 젓가락 하나 가지고 이 친구 저 친구 맛난 반찬 한 점씩 취했던 성권이, 아침 일찍 도시락 다 까먹고 교탁 바로 밑에 자리에서 오전시간 내 내 잤던 모르핀(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내 참다 못생긴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도시락 까먹던 반장 수목이 모두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국어대사전과 수학의 정석
책상 위 책꽂이에 이희승박사의 국어대사전이 눈에 띤다. 학생이 있는 집에서는 어디서나 갖추고 있는 필수품이었다. 지금은 저 사전을 네이버가 대신하고 있다. 몇 해 전까지 집안 책장에는 저 사전이 꽂혀있었다. 그 유명한 홍성대 선생님의 "수학의 정석 I"이 보인다.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이 입시의 필독서였던 시절이다. 저 책으로 공부하던 기억이 생생하고, 홍성대 선생의 아들이 같은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난다. 저 가방을 가지고 학교를 다녔고, 저 책상에서 공부를 했고, 저 사전과 저 책으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책상아래는 삼양라면 봉지로 접어만든 방석 하나쯤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여학생이 있는 집은 껌 종이로 접은 종이학을 넣어두던 유리병이 하나쯤 놓여 있던 시절이다.
삼양라면 방석
한 세대도 채 지나지 않아 박물관에서 찾은 세월이 빠르고 다이나믹 해,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아들녀석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손도끼와, 향로와, 첨성대보다 더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 때 그 물건들을 박물관에서 접하니 "살아 있는 박제"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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